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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사회적경제

[특집2] “당신은 알고 계셨어요?”
2018-07-13 조회 767 댓글 0
특집2ㅣ"당신은 알고 계셨어요?"


우리 일상과 문화에는 수많은 성차별과 혐오의 표현들이 가려져 있습니다. 개인의 연결망이자 생활의 바탕인 마을은 이런 차별문화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불평등한 일을 바로잡는 실천은 아는 것. ‘각성’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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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과 무지는 차별을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히든 피겨스>. (ⓒ영화 <히든 피겨스>)

“아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다” 영화 <히든 피겨스>

영화 <히든 피겨스>(2016)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 우주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NASA에서 전산원으로 일하던 캐서린은 천부적인 수학 능력 덕에 우주 비행 프로젝트에 흑인 최초로 선발됩니다. 백인들로만 이루어진 새로운 부서에서 캐서린이 처음 마주친 문제는 화장실입니다. 유색인종 화장실을 찾아 다른 건물을 오가느라 하루에 수십 분씩 자리를 비우게 됩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국장 해리슨은 그녀를 오해하고 추궁합니다. 

“대체 어딜 다녀왔나? 필요할 때마다 안 보이던데. 대체 매일 어디 가는 거야?” “화장실 다녀왔습니다.” “화장실? 40분씩? 거기서 뭐 해? 이렇게 바쁜데 믿음에 보답을 해야지.” “이곳엔 제가 갈 화장실이 없습니다. 이 건물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고 서관 전체에도 없어서 800m를 나가야 해요. 알고 계셨어요?” 
잠자코 듣던 해리슨은 곧 화장실의 ‘유색인 전용’ 간판을 때려 부숩니다. 이제 NASA에는 유색인 화장실도 없고 백인 화장실도 없다고,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가까운 화장실을 이용하라고 외치면서요.   

저는 이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캐서린의 “알고 계셨어요?(Did you know that?)”라는 항변이요. 백인 위주의 조직에서 흑인인 캐서린이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백인인 국장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이런 무관심과 무지가 차별을 지속시키는 원인입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무지는 변명이 되어줍니다. ‘난 정말 몰랐어’ 무지는 면죄부가 되어줍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이었는데, 독일 국민은 고의적인 태만함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유죄라고 프리모 레비는 단언합니다. 

아는 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해리슨 국장은 캐더린의 어려움을 알게 되자 차별적 환경을 바꾸었습니다. 물론 알게 되었다고 누구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차별적 상황을 묵인하기는 힘듭니다. 타인의 경험을 알게 되면 그 경험에 녹아있는 감정들에 공감하게 되고 그러면 그의 고통을 불편해하는 감수성이란 게 우리 안에 분명 있으니까요.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의 문제’에 무관심합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나보다 어리고 지위가 낮은, 한마디로 ‘을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더욱이요. 물론 여성이라고 저절로 다른 연령, 다른 계층 여성들의 삶을 훤히 알지는 못합니다. 젠더는 홀로 작동하지 않거든요. 언제나 계급, 인종 등 다른 범주들과 교차해서 작용합니다.

마을 안에 꼭 필요한 젠더 감수성 

마을은 사회적 연결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립된 도시민들은 이런 연결망을 인위적으로 지어서 스스로를, 서로를 돌보려 합니다. 그런데 젠더·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는 어떤가요.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유행하던 무렵입니다. 한 여자아이가 어린이집에 왕관머리띠를 쓰고, 엘사공주가 그려진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고 등원했습니다. 문 앞에서 아이를 맞이하던 교사가 “아무개 왔니. 공주님같이 참 예쁘구나.”하고 칭찬하며 인사합니다. 뒤이어 들어오는 다른 여자아이도 맞이합니다. “아무개 왔니.” 그런데 예쁘다는 칭찬은 해 주지 않습니다. 왕관머리띠도, 드레스도, 구두도 없었거든요. 다음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방의 여자아이들이 죄다 왕관머리띠에, 드레스에, 구두를 입고 등원했습니다. 매일 나들이를 나가는 공동육아어린이집임에도 말입니다. 선생님은 아무런 의도 없이 무심코 한 말입니다. 그냥 그 아이가 예뻐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의 발언은 아이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권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입고 가면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칭찬하시는구나.” 또는 “내가 이렇게 입으면 선생님의 관심도, 칭찬도 못받는구나.” 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입니다. 어른들은 젊은 여성이나 소녀들에게 예쁘다, 귀엽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칭찬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쁘다, 귀엽다, 섹시하다는 말은 못생겼다, 뚱뚱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기분 좋을지 몰라도 결국은 외모를 평가하는 발언입니다. 아름다움은 여성을 구속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억압입니다. 흔히 여성을 꽃에 비유합니다. “아무개씨는 우리 코너의 꽃이예요.” 칭찬이라고 던지는 말들이 사실은 여성을 ‘꽃’의 역할에 한정짓습니다. 꽃이라 불리는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꾸밈노동과 감정노동을 성실히 수행합니다. 그러다 번아웃된 소녀들이 지금 ‘탈코르셋’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통을 ‘나 몰라라’ 했던 우리 어른들은 모두 유죄입니다.   
▲공책 표지에 적힌 표현들. 10대들에게서 강하고 보편적인 여성혐오가 보이는 것은 더욱 문제다.
▲ 공책 표지에 적힌 표현들. 10대들에게서 강하고 보편적인 여성혐오가 보이는 것은 더욱 문제다.


예쁜 여성은 성공의 보상이다? 

동네문구점에 아이들 공책을 사러 갔습니다. 한 공책이 눈에 띕니다. 표지에 적힌 말 때문입니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 이건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밑바탕에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그릇된 편견을 깔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여성을 비하할 의도로 쓰이지 않습니다. 소년과 젊은 남성을 독려하고 동기 부여하려고 쓰는 말입니다. 딴짓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해! 네가 성공만 하면 어리고 예쁜 여자들이 줄을 서게 되어 있어! 이런 충고를 듣는 소년들은 무의식에다 새깁니다. ‘예쁜 여자는 성공한 남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고 전리품이다…’라구요. 
경제학자 우석훈씨는 『솔로계급의 경제학』에서 청년 솔로들에게서 강한 여성혐오가 나타난다고 우려합니다. 책 쓰면서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30대보다 20대, 그리고 이들보다 10대들에게서 더 강하고 보편적인 여성혐오가 발견됐다는 겁니다. 대안학교 남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예쁘고 섹시한 아리따운 여성은 내 몫이 아닙니다. 그녀는 잘 나가는 성공한 남성이 차지할 겁니다. 고약한 심보가 발동합니다. 그런 남자들의 심리를 과격하게 대변한 영화가 김기덕의 <나쁜 남자>입니다. 주인공은 남대생의 소유물인 여대생을 갈취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남성들 간의 계급 갈등 속에서 여성은 소유물로 취급됩니다. 
 

▲음란물 유포와 관련된 범죄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 (ⓒ영화 나를 기억해)
▲ 음란물 유포와 관련된 범죄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 (ⓒ영화 <나를 기억해>)

우리는 일상의 성폭력에서 자유로운 마을입니까? 

지난 여름, 한 여대생을 만났습니다. 더운 날씨인데 가방 안에 후드티가 들어있습니다. 여름에 왠 후드티? 불법카메라 때문에 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젊은 여성들은 집 밖을 나오면 화장실을 가는 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물도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일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화장실을 가게 되면 일단 구멍이 있나 점검합니다. 의심되는 곳은 가방 안에 상비하는 송곳으로 찌릅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후드티를 입은 다음 볼 일을 봅니다. 학교, 사무실, 커피숍, 식당, 공공장소 그 어디도 불안합니다. 우리 마을 내 화장실은 안전하다고, 그렇게 ‘유난떨지 않아도 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 대학교수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수업시간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남녀 학생들을 섞어 모둠활동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남학생들이 수업중 카톡방을 만들어 모둠 내 여학생들을 품평하고 비하합니다. “아무개한테 예쁘다고 말해봐. 어떻게 나오자 보자.” 마치 롤플레이 게임을 하듯 여학생들을 ‘가지고 놉’니다. 멀쩡한 얼굴로 같이 토론하고 수업하는 동료(라고 여긴) 남학생들이 뒤로 그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여학생들은 까무러칩니다. 대체 누굴 믿을 수 있을까요? 제 세대 여성들이 겪은 고전적 불안, 그러니까 으슥한 골목길, 어두운 밤길만 무서운 게 아니라 안전하다고 믿었던 가까운 친구들조차 이제는 불안의 요소입니다. 심지어 사랑하던 연인이 ‘리벤지’를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십대 여성들은 환경에 떠밀려 ‘혼전순결’을 다짐하고 있답니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내 안전은 오로지 내가 지켜야 하는 이 상황을 “당신은 알고 계셨어요?”


15~18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양성평등실태조사(2016) 결과가 의미심장합니다. 현재 우리사회의 양성평등 수준이 어떠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니 소녀들은 대부분(76%) 여성이 불평등하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소년들의 경우 여성이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32.1%), 남성이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31.7%). 5년 후에는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지 물었을 때 절반 가까운 소년들이(40%) 남성 불평등한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조만간 남성에게 불리한 사회가 오리라는, 소년들의 불안감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소녀와 소년간의 이 격차를 주목해야 합니다. 제가 사는 마을, 그리고 여러분의 마을에서도 소년들과 소녀들이 ‘위협’, ‘피해’, ‘손해’라는 언어로 위태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_이정주 
* 글쓴이는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전공했으며 
또하나의문화, 여성신문,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오래 일했다.
성미산 마을에 살고 있으며 젠더, 페미니즘, 생태학을 읽고 쓰고 강의하며 살고 있다.


출처: 서울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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